한국 영화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 아는것은 당시의 한 편의 영화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당시의 사회와 문화, 기술의 발전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지금 많은 영화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K-무비라고 칭해지면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며 다양한 세계 영화제에서 수상을 휩쓸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뿌리는 100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 최초 상영 영화로 알려진 ‘의리적 구토’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고문헌 기록과 역사적 배경, 당시 관람 문화, 그리고 오늘날의 복원과 보존 시도까지 자세히 정리해봅니다. 단순히 과거의 영화 이야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보고자 함입니다.
고문헌에 남은 ‘의리적 구토’의 흔적
1919년 10월 서울 단성사에서 상영된 ‘의리적 구토’는 대한민국 영화사에서 첫 번째 상영작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김도산 감독이 제작한 무성영화로, 당시 대사 없이 상영되며 변사가 줄거리와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영화와 관객이 소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지금은 필름이 유실되어 실물 자료가 존재하고 있지 않아 그 영화를 볼 수는 없지만, 다행히도 당대의 신문과 각종 인쇄물을 통해 이 영화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기록은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당시 주요 일간지에 실린 영화 상영 광고와 관람했던 후기입니다. 이와같은 자료를 통해 영화의 제목, 상영 시간, 출연자 정보, 그리고 줄거리의 개요까지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19년 10월 27일자 기사에서는 “단성사에서는 의리와 효를 주제로 한 조선 최초의 영상극을 상영 중이다”라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문화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회 윤리와 가족 중심 가치를 강조한 교화적 콘텐츠로 영화가 활용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고문헌에는 이외에도 당시의 이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상세히 기록된 부분이 존재합니다. 한 편지글에는 “당시 단성사에 들어갔을 때, 마치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인 듯했다. 변사의 목소리와 함께 화면이 살아 움직이니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처럼 문헌을 통해 ‘의리적 구토’가 조선의 문화에 어떤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줬는지를 간접적으로 남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록물이 단순한 정보의 전달을 넘어, 그 시대 감성까지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습니다.
상영관과 관람 문화의 시작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장소인 단성사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현대적인 극장 중 하나였습니다. 1907년에 설립된 단성사는 원래 전통 연극과 무대극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191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영화 상영이 점차 보편화되면서 영화 전문 극장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고문헌에 따르면 단성사는 이미 1915년부터 외국 영화를 수입해 상영했으며, '의리적 구토'를 통해 최초로 한국인이 만든 영화를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영화 관람은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변사가 화면 앞에 서서 장면마다 해설을 붙여주었고, 관객들은 이를 따라 감정을 공유했습니다.
변사의 톤과 억양, 해석에 따라 영화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인기 있는 변사는 당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고문헌 중 하나인 ‘극장 일지’에서는 특정 변사가 출연하는 날에 표가 조기 매진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관
람 문화도 꽤나 세분화되어 있었습니다. 좌석은 가격대별로 구분되었고, 상류층은 앞자리, 서민은 뒷자리에 배치되었습니다. 상영 시간은 일반적으로 저녁 시간대였으며, 주말에는 낮에도 특별 상영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티켓 가격은 당시 쌀 한 되 가격과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수준으로, 영화 관람은 결코 값싼 여가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영화 상영 전후에는 극장 앞에 군것질 거리나 연극 관련 물품을 파는 노점상이 줄을 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상영작과 관련된 사진이나 엽서, 브로마이드도 판매되었습니다.
이는 단성사 중심의 영화 문화가 단순한 관람을 넘어서 당시 서울 도심에서 하나의 ‘축제’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의리적 구토’는 그러한 축제의 중심에 있었으며, 조선 영화 문화의 실질적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최초 영화 기록의 한계와 보존 노력
‘의리적 구토’를 비롯한 한국 초기 영화들은 필름이나 영상이 대부분 유실되어 실물 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일본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그리고 영상 매체에 대한 보존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당시 필름은 질산염 필름으로, 보존이 어렵고 화재 위험성도 컸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사라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다양한 신문 기록, 광고지, 개인 편지와 일기 등 문헌을 통해 간접적인 정보들이 상당수 전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서는 이러한 고문헌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디지털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영상자료원은 2019년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의리적 구토’ 관련 신문 광고, 관람 후기를 정리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공개했습니다. 이 자료들은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영화사 교육과 문화유산 보존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학술적으로도 영화의 복원과 해석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영상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당시 관객의 관람기록, 연출자나 변사의 증언, 비평가들의 평론 등을 모아 다큐멘터리나 재구성 연극 형태로 새로운 방식의 복원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의리적 구토’를 다룬 연극이나 전시회에서는 당시 관람 장면을 재현하거나, 변사의 나레이션을 녹음해 현대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등의 시도가 있습니다.
결국 기록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해석’과 ‘재창조’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셈입니다. 남은 단서를 퍼즐처럼 조합해 새로운 형태의 기억을 만드는 이 과정은 문화유산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오늘날의 영화팬들도 단지 최신 작품에만 몰두하기보다는, 이처럼 역사의 한 조각을 찾아보고 복원해보려는 시도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 최초의 상영영화 ‘의리적 구토’는 단순한 과거의 영상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과 창조성을 상징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영화는 상영관, 관람 문화, 변사의 존재, 그리고 관객의 반응까지 복합적인 요소를 통해 당시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고문헌이라는 간접적 자료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이 콘텐츠는, 오히려 현대 기술과 창의력을 통해 더 풍부하게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문화는 기록되는 순간부터 역사로 남지만, 그것을 어떻게 현재와 연결하느냐에 따라 살아있는 자산이 될 수도, 잊힌 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한국의 많은 연구 기관들과 창작자들은 ‘의리적 구토’와 같은 초기 영화들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보존과 복원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는 후손들에게도 커다란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고문헌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온라인 아카이브, 메타버스 전시, VR 영화관 등 새로운 기술이 고전 영화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영화사에 관심이 있다면 ‘의리적 구토’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세요. 단지 첫 영화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떻게 영상이 삶과 역사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는지를 상징하는 귀중한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만드는 모든 영상 콘텐츠 또한, 언젠가는 미래 세대가 들여다볼 또 다른 ‘고문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되새겨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