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표적인 고전 극장들, 단성사, 피카디리, 서울극장은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장소로 자리 잡았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하나둘 문을 닫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서울 3대 극장이 각각 마지막으로 상영한 영화들을 비교하며, 극장별 역사와 상영작의 의미, 그리고 이 극장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단성사의 마지막 영화: '황산벌'
단성사는 1907년에 개관한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으로, 서울 종로에 위치하며 20세기 한국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해왔습니다. 조선 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근대화 시기까지 단성사는 연극과 영화, 음악회 등 다양한 예술이 교차하는 복합 문화공간이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단성사는 2001년 멀티플렉스 극장의 확산과 상권 변화에 밀려 문을 닫게 되었는데, 이는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단성사의 마지막 상영작은 2003년에 개봉한 영화 황산벌입니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하고 박중훈, 정진영, 이문식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백제와 신라 간의 전투를 유쾌하게 풍자한 역사 코미디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전쟁 서사가 아니라, 지역감정과 권력 구조, 영웅의 허상 등을 해학적으로 꼬집으며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특히 '개그와 풍자'라는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면서도 작품성 또한 인정받아 흥행과 비평 양쪽 모두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습니다. 단성사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선택한 데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성사는 늘 한국적인 콘텐츠에 집중해온 극장이었으며, 관객과의 정서적 교감을 중시해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산벌'은 한국의 역사, 언어유희, 지역성을 모두 집약한 작품으로, 단성사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치와도 일치했습니다. 단성사의 마지막 불이 꺼지던 날, 종로의 거리엔 수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기억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습니다.
피카디리 극장의 마지막 상영작: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피카디리 극장은 1960년대 중반에 서울 종로에 개관해 수십 년 동안 젊은 세대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대학가와 가까운 입지, 감각적인 인테리어, 당대 최신작 개봉으로 인해 청소년과 연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습니다.
서울 중심 상권에 위치한 만큼 개봉 첫날마다 긴 줄이 늘어서는 풍경은 피카디리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극장 내부의 감성적인 분위기는 하나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디지털 상영 방식의 확산과 멀티플렉스 극장의 강세로 인해 피카디리의 운영은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관객 수는 줄고, 노후된 시설과 관리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결국 2007년, 피카디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상영된 영화는 2005년 개봉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옴니버스 형식의 로맨스 드라마로, 서로 다른 인물들의 사랑과 삶을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연령과 계층, 배경이 다른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인생이 교차되는 장면들을 통해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게 펼쳐 보입니다. 중장년의 사랑, 첫사랑의 설렘, 가정과 일 사이의 갈등 등 관객층을 아우르는 이야기 구성은 피카디리 극장의 관객 분포와도 닮아 있었습니다.
마지막 상영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극장을 찾은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과 추억을 하나로 묶어내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데이트, 가족 나들이,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의 영화 관람이 피카디리에서 이루어졌기에, 그 마지막 장면은 감동과 아쉬움이 동시에 남는 순간이었습니다.
서울극장의 마지막 개봉작: '기생충' 이후의 여운
서울극장은 1964년 개관 이래 종로 3가의 대표 극장으로,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초기에는 대규모 단관 극장으로 시작했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점차 복합상영관으로 전환하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갔습니다.
특히 인디 영화와 예술영화의 상영에 힘을 실으며, 단순히 상업 영화를 소비하는 공간이 아닌 문화예술 향유의 공간으로 변모해왔습니다.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아우르는 큐레이션, 시네마토크, 특별 상영전 등은 서울극장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로 자리잡았고, 독립영화계에서도 중요한 플랫폼으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2020년대 초 코로나19 팬데믹과 OTT(넷플릭스, 티빙 등) 플랫폼의 성장으로 인해 오프라인 극장은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 여파로 서울극장 역시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2021년 8월을 끝으로 57년 역사를 마감하게 됩니다.
폐관 당시 서울극장은 특별 상영전과 다양한 영화 리마스터링 프로그램을 통해 관객과의 마지막 인사를 전했으며, 이 가운데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상영작은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었습니다.
기생충은 2019년 개봉 이후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을 수상하며 세계 영화계의 중심에 한국 영화를 올려놓은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서울극장이 이 작품을 마지막 라인업에 포함시킨 것은 단순한 인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영화의 자부심을 담아내기 위한 상징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기생충은 계급 문제와 사회적 양극화라는 복잡한 주제를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전 세계 관객들의 공감과 비평가들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 작품이 서울극장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사실은, 한국 영화의 발전사와 함께 걸어온 서울극장의 정체성을 완성시키는 의미심장한 선택이었습니다.
단성사, 피카디리, 서울극장. 이 세 극장은 단순한 영화 상영관을 넘어서, 시대와 문화, 사람들의 삶을 담아낸 공간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지막 상영작들을 통해 우리는 각 극장이 지닌 정체성과 상징성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습니다.
단성사의 황산벌은 한국적 정서와 역사적 시선을 담아낸 작품으로서, 전통과 풍자의 조화를 보여주었습니다. 피카디리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을 연결하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서울극장의 기생충은 한국 영화의 글로벌화를 상징하며, 문화적 자긍심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극장들이 문을 닫은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영화를 통해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영화는 사라지지 않으며, 극장의 불은 꺼졌지만 그 안에서 울고 웃던 관객들의 기억은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숨 쉽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극장, 새로운 콘텐츠가 생겨나겠지만, 단성사와 피카디리, 서울극장은 한국 영화계의 기초를 다졌던 소중한 공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이 글이 여러분에게 잊고 있던 극장 속 추억을 다시 떠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